매일의 소란 속에서 숨 쉬고 싶은 당신에게
내일의 생계를 위해 치열하게 달리고 나면, 어느덧 찾아오는 밤이 있습니다. 이불을 덮고 누웠지만 머릿속은 온갖 걱정과 고민으로 복잡하고, 가슴 한구석에는 이유 모를 슬픔과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때로는 일터에서 겪은 짜증과 분노가 가라앉지 않고, 때로는 쳇바퀴 도는 일상이 지루함과 고통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만약 누군가 당신에게 “그 모든 걱정과 고민, 슬픔과 분노, 지루함과 불행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어떤 생각이 먼저 드십니까? 아마 대부분은 대번에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건 불가능해. 사람이 어떻게 감정도 없이 로봇처럼 살아? 세상이 이렇게 팍팍한데 어떻게 안 울고 안 화내며 살 수가 있겠어.”
맞습니다. 우리의 상식과 경험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해 보입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것은 분명히 가능합니다. 아주 오래전, 인류 역사상 가장 혼란스럽고 가혹했던 시절을 살았던 이들이 온몸으로 그 자유를 증명해 냈기 때문입니다. 바로 초기 신약교회 시대를 살아가던 평범한 서민들과 제자들이 일구었던 가정교회 정신 안에 그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 자유는 특정한 소수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인류라는 거대한 가족 안에 태어난 모든 이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진정한 특권입니다. 그런데 왜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오랜 시간 마음의 수련을 하거나 신앙을 가졌다고 말하는 이들조차 이 진리를 경험하지 못한 채 여전히 불행의 파도에 휩쓸려 살아가는 걸까요? 오늘 그 보이지 않는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를 함께 찾아보고자 합니다.
1. 에니어그램의 아홉 가지 결을 채우는 환대
우리는 저마다 타고난 성향과 성격의 결이 다릅니다. 사람의 성격을 아홉 가지 빛깔로 나누는 에니어그램(Enneagram) 시스템을 보면 우리가 왜 그렇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아파하고 고민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 완벽을 추구하며 늘 세상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느라 스스로를 볶아치는 사람(1번 유형)
- 남을 돕느라 정작 자기 안의 소외감과 섭섭함에 눈물 흘리는 사람(2번 유형)
- 성공과 성과에 매달려 지칠 줄 모르고 달리다 번아웃에 빠지는 사람(3번 유형)
- 깊은 우울과 고독 속에서 자신만의 특별함을 갈구하는 사람(4번 유형)
- 세상과 거리를 두고 끊임없이 지식의 성벽을 쌓으며 두려움을 감추는 사람(5번 유형)
-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늘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며 전전긍긍하는 사람(6번 유형)
-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늘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 헤매지만 내면은 공허한 사람(7번 유형)
- 상처받지 않기 위해 강한 척 타인을 통제하려다 분노를 터뜨리는 사람(8번 유형)
- 갈등이 두려워 평화라는 가면을 쓰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지워버리는 사람(9번 유형)
초기 신약교회의 사도들이 보여준 삶의 방식이 위대했던 이유는, 바로 이 아홉 가지 전혀 다른 마음의 결과 상처들을 단 하나의 조건도 없이 있는 그대로 품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가정교회는 제도나 형식이 아니었습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불안해해도, 화가 나 있어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의 성향과 문화적 배경을 잣대로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내 기준대로 상대를 고치려 드는 내면의 ‘과잉 에너지’를 내려놓는 프락시스(실천적) 분별력이 그 식탁 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판단도 없이 내 존재가 고스란히 받아들여지는 치유의 공간(가정교회)을 경험할 때, 인간은 비로소 나를 갉아먹던 모든 부정적인 감정의 사슬을 끊고 진정한 내면의 평화를 마주하게 됩니다.
2. 왜 우리는 이 자유와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 놀라운 해방을 매일의 삶에서 누리지 못하는 걸까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자꾸만 ‘나의 힘과 노력’으로만 그 상태에 도달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 의지로 걱정을 안 하려고 애쓰고, 내 인내심으로 분노를 억누르려고 하니 마음에 과도한 압력과 과잉 긴장(잉여 포텐셜)만 쌓이게 됩니다. 그러다 결국 한계에 부딪히면 “역시 인간은 안 돼, 성경이나 성인들의 말씀은 그냥 이상향일 뿐이야”라며 텍스트의 가치와 능력을 깎아내려 버립니다.
하지만 사도들이 전한 메시지의 본질은 다릅니다. 내 생각과 내 주먹에 꽉 쥔 힘으로 그 자유를 이루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능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대신,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내면에 거하시며 이 모든 경이로운 능력을 친히 이루어가실 하나님의 영, 즉 성령(Holy Spirit)의 숨결을 신뢰하고 그분께 내 마음의 운전대를 맡기라는 뜻입니다.
종교적 언어가 낯선 분들이라면 이렇게 이해하셔도 좋습니다. 내 안의 거친 자아(Ego)의 고집을 내려놓고, 우주와 삶을 움직이는 거대하고 신비로운 평화의 흐름에 나를 온전히 내맡기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상대를 변화시키거나 내 상황을 통제하려는 욕심을 멈출 때, 비로소 내면에서부터 솟아나는 초자연적인 평안과 능력이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내 안의 영적인 에너지가 회복될 때, 우리는 비로소 환경에 휘둘리는 노예가 아니라 삶의 진정한 주인(Transurfer)으로 우뚝 서게 됩니다.
3. 오늘, 우리 삶의 자리에서 시작하는 구체적인 대안
다양한 문화와 인종, 성격의 장벽을 넘어 우리 모두가 이 진정한 특권과 자유함을 누리기 위해 오늘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작은 발걸음들이 있습니다.
① ‘3초 보류’로 내면의 과잉 에너지 가라앉히기
에니어그램의 어떤 유형이든, 내 마음에 짜증과 분노, 불안이 밀려올 때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마십시오. 숨을 크게 들이쉬며 딱 3초만 내 마음을 가만히 바라보십시오. ‘아, 내 안에 지금 과도한 집착과 긴장이 쌓이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성령의 평안이 일할 수 있는 내면의 여백이 생겨납니다.
② 판단이 없는 ‘쉼의 식탁’ 차리기
주변에 유독 불안해하거나 까칠한 이웃, 혹은 가족이 있다면 그들의 성격을 고치려고 들지 마십시오. 신약교회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저 따뜻한 차 한 잔, 밥 한 끼를 대접하며 그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용납해 주십시오. “당신은 어떤 모습이든 이 자리에서 안전하게 쉴 수 있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전달하는 작은 가정교회를 당신의 거실에서 시작해 보십시오.
맺으며: 당신에게 약속된 진정한 해방을 향하여
사랑하는 여러분, 걱정과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는 결코 불가능한 꿈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생각의 나라에 살며 매일 상처받는 이 거대한 분열의 시대 속에서, 신약교회가 보여준 환대와 성령이 주시는 내면의 능력은 우리를 치유할 유일한 열쇠입니다.
당신의 능력을 탓하며 주저앉지 마십시오. 당신의 성격 유형의 한계에 갇히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 평화의 기적을 이루실 거룩한 영의 인도하심을 믿고, 오늘 내 곁의 사람에게 따뜻한 손을 내미십시다. 그 작은 환대의 실천들이 모여 갈라진 대한민국을 잇고, 마침내 인류라는 하나의 가족 안에 흐르는 진짜 평화를 완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해방의 기쁨을 오늘 당신이 가장 먼저 누리시기를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내 삶의 자리에서 진정한 내면의 자유를 경험하기 위해, 함께 대화해 볼 주제들입니다:
나의 에니어그램 유형에 맞는 내면 평화 유지법 찾기
종교적 배경이 다른 이웃과 부담 없이 ‘가정교회 정신’ 나누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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