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고생한 당신을 위한, 집(Home) 이야기

어느 지친 하루의 끝에, 당신의 문을 두드리며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오늘 하루도 참 고생 많으셨습니다. 팍팍한 살림살이에,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일에 얼마나 몸과 마음이 고단하셨습니까. 땀 흘려 일하고 돌아오는 길, 마음 편히 기댈 곳 하나 없는 현실 속에서 문득 외롭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으셨는지요.

가만히 우리 사는 세상을 둘러보면, 참 마음 둘 곳이 없습니다. 뉴스만 틀면 대한민국 이념 갈등이니 뭐니 하며 매일같이 서로를 헐뜯고 싸우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한 동네에 살고 똑같은 시장에서 반찬거리를 사면서도, 정치적 생각이 다르면 원수처럼 쳐다봅니다. 믿는 종교가 다르면 마음의 벽부터 세우고, 심지어 가장 가깝다는 부부 사이조차 ‘남자의 세계’와 ‘여자의 세계’로 갈라져 “도무지 말이 안 통한다”며 등을 돌리기 일쑤입니다. 한 지붕 아래 살면서도 저마다 다른 나라에 사는 외딴섬처럼, 우리는 참 외롭고 경직된 시대를 버텨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주 오래전 이 땅보다 훨씬 더 차갑고 가혹했던 시절, 이 분열의 장벽을 무너뜨린 위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거창한 영웅들의 전쟁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처럼 평범하고 하루하루가 고달팠던 서민들이 자기 집 문을 열고 시작한 ‘식탁의 기적’, 즉 신약교회의 가정교회 정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과연 어떻게 살았기에 분열된 세상을 치유하고 진짜 평화를 만들어냈는지, 한 통의 편지를 읽듯 편안하게 마음을 열고 들어보시지 않겠습니까?

1. 신약교회 사도들이 살아간 방식: 섞일 수 없던 자들의 눈물겨운 식탁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거대했던 로마 제국 시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사회는 사람의 신분을 칼로 자르듯 엄격하게 나누어 놓았습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고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던 노예와 주인이 같은 공간에 섞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회적 범죄였습니다.

그런 서슬 퍼런 압제 한복판에서, 사도들과 초기 성도들은 아주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거대한 대리석 건물도 없었고, 대단한 권력도 없었습니다. 그저 평범한 서민의 ‘집(Home)’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집 문을 열고 들어가면,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경이로운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평생 서로를 개처럼 여기며 미워했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낮에는 채찍을 들고 무자비하게 압제하던 주인과 그 밑에서 피눈물을 흘리던 노예가 한 상에 둘러앉아 있었습니다. 사람 수에도 들지 못하고 격리되었던 여성들이 남성들과 함께 당당히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형제여, 자매여’라고 부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들이 모여서 밤새도록 정치를 논하며 대립했습니까? 서로의 생각이 맞다고 교리 논쟁을 벌였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그들의 일상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사도행전 2:46)

이 짧은 한 줄 속에는 사도들이 목숨 걸고 지켜냈던 진짜 삶의 방식이 들어있습니다.


초기 신약교회 사도들의 3대 삶의 방식

  1. 조건 없는 '존재적 환대' (신분과 이념을 묻지 않는 포용)

  2. 일상의 떡을 떼는 '프락시스(실천)적 사랑' (진짜 밥을 나누는 나눔)

  3. 가면을 벗는 '안전한 쉼의 공간' (세상의 긴장을 녹이는 대지)

그들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의 신분증을 검사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어느 진영에 서 있는지 묻지 않고 오직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는 존재적 환대를 베풀었습니다. 머릿속 관념이 아니라 진짜 따뜻한 밥을 지어 함께 떡을 떼는 프락시스적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로마라는 거대한 힘의 논리에 짓눌려 숨 막혀 하던 서민들에게, 아무런 가면을 쓰지 않아도 온전히 쉴 수 있는 안전한 완충지대를 내어준 것입니다.

2.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전하는 눈물 어린 대안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정치인들은 자기들의 이권과 권력을 위해 매일같이 이념의 경계를 정하고 우리를 갈라치기 합니다. 거기에 속아 가장 소중한 가족과 이웃을 적으로 돌리고, 내 안의 분노를 키우며 스스로를 갉아먹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거대한 중앙 정치를 당장 바꿀 수는 없을지라도, 사도들이 걸었던 그 길을 따라 우리 삶의 자리에서 공동체 회복을 시작할 구체적인 방법들이 있습니다.

대안 1) 거대 담론을 걷어낸 ‘우리 집 밥상 공동체’를 시작하십시다

세상에 떠도는 자극적인 정치 뉴스, 이념의 논쟁들을 내 집 식탁 위로 끌고 오지 마십시오. 한 달에 한 번만이라도, 생각이 달라 서먹했던 가족이나 이웃을 우리 집 식탁으로 초대해 보십시오. 그리고 한 가지 규칙을 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정치, 종교, 이념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만 합시다.” 구체적인 삶의 애환을 나누고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대접할 때, 상대방은 꺾어야 할 적이 아니라 나와 똑같이 지치고 눈물 흘리며 살아가는 ‘가여운 한 인간’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관계를 살리는 프락시스 분별력의 시작입니다.

대안 2) 내 안의 옳음을 내려놓는 ‘3초 보류’의 마음을 품으십시다

누군가 나와 다른 정치적 견해를 말하거나 가치관을 이야기할 때, 내 안에서 즉각적으로 타오르는 분노와 ‘틀렸다’고 말하고 싶은 과도한 집착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때 한 걸음만 뒤로 물러서 보십시오. 반박하는 대답 대신, “그렇게 생각하게 되기까지 참 많은 마음의 고생과 여정이 있으셨겠군요” 하고 딱 3초만 판단을 보류해 보십시오. 상대를 내 입맛대로 뜯어고치려는 욕심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상대방도 뾰족하게 세우고 있던 방어기제를 풀고 숨을 쉬기 시작할 것입니다.

대안 3) 조건 없이 서로를 품어주는 ‘현대판 가정교회’를 만드십시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작은 일에도 쉽게 분노하고 탓을 돌리는 이유는, 온통 경쟁과 평가뿐인 세상 속에서 내 영혼을 안전하게 누일 ‘쉼터’가 없기 때문입니다. 거창한 조직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내가 속한 작은 소모임이나 동호회, 혹은 구역 모임에서만큼은 세상의 조건과 능력을 평가하는 가위질을 멈추십시오. 잘 살든 못 살든, 생각이 같든 다르든, “그곳에만 가면 내 지친 영혼이 온전히 쉴 수 있다”는 신뢰를 주는 안전한 소그룹을 한 사람이 딱 하나씩만 만들어가십시다.

맺으며: 다시, 하나의 가족이 되기 위하여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세상은 본래 하나의 커다란 가족입니다. 올림픽 경기장에서 선수들이 규칙 안에서 정정당당하게 경쟁하고 끝내 서로를 안아주듯이, 우리 삶도 충분히 그렇게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힘을 가진 세력들이 쳐놓은 분열의 덫에 걸려, 우리의 소중한 영혼과 이웃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이제는 멈추어야 합니다.

내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내면의 과잉 포텐셜을 가라앉히십시오. 그리고 오늘 저녁, 당신의 소중한 이웃과 가족을 향해 먼저 따뜻한 손을 내밀어 보십시오.

비록 이념과 가치관의 차이로 처음에는 서툴고 어색할지라도, 우리가 서로를 향한 환대와 일상의 실천을 포기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한 지붕 아래 묶인 진짜 이웃이 될 것입니다. 저 옛날 사도들이 작은 방 한칸에서 로마를 뒤흔드는 평화의 기적을 일구었듯, 오늘 당신의 소박한 밥상 위에서 분열된 대한민국을 치유하는 위대한 공동체의 회복이 시작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소망합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마음 평안한 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편지 속 약속을 하나씩 실천해 가기 위해, 함께 묵상해 볼 주제들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마주했을 때 내면의 평화를 지키는 마음 훈련법

바쁜 현대 사회에서 환대와 쉼의 밥상 소그룹을 시작하는 현실적인 매뉴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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